청주 중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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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중앙공원은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각종 음악회와 발표회가 열린다.
공원 안에 1,000년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충북기념물 5)
압각수와 영문.
목조 2층 누각인 병마절도사영문(충북유형문화재 15)
청주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져 서원현감 이병정이
세운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는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호서읍지와 청주읍지를 보면 정곡루가 병영에 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병영내에 누각은 통군루와 정곡루가 있을 뿐인데 ‘충청병영도’와
‘청주읍성도’에 통군루는 문루 안쪽의 서편에 있는 2층 건물로 나타나 있어, 정곡루가 바로 문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병영이나 수영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성곽건축이다.
나뭇잎이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이 붙은 은행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고려말 공양왕 때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 일파를 없애기 위해 중국 명나라로 가서 이성계가 공양왕과 함께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정지·이승인·권근 등이 청주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홍수가 났다. 이 때 근처에 나무가 있어 죄수들이 올라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 나무가 바로 압각수였다는 것이다.
삼일운동 기념비.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
5.16혁명 기념비.
망선루.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형식이다. 현재 1층은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척화비(충북기념물 23). 1978년 10월 27일 충청북도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08㎝, 나비 47㎝이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이다.
척화비의 내용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말이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란 말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내용은 측면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이 척화비는 윗부분이 깨어져 洋자와 則자가 없어졌다. 1976년 2월 29일 석교동(石橋洞)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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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Pourcel.mp3 (856.9K)
74회 다운로드 | DATE : 2013-09-13 11: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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