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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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의 첫째 날이군요.
풍요로운 추석이 있는 달이고, 곧 선선한 가을바람이 기대되는 달입니다.
하지만 9월은 한편으론
비참한 역사가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는 강도 7.9의 큰 지진이 일어나 12만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14만명의
사상자와 340만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동대진재죠.
[재난 직후 도쿄의 모습]
재난으로 인해 일본은 국가적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사회적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불안이 만연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내각은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나고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우물에 조선인이 독을 넣었다.’와
같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언비어는 기정사실화되어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사람만 보이면 죽창과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때려 죽인 것이죠.
[신문사로 보내진 유언비어와 일본경찰 및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장면, ]
일본정부와 언론들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선동하고 방조하며 우리 동포의 피해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중국인과 더불어 조선인과 관련된
일본인들은 물론, 오키나와가 있는 류큐열도의 주민들은 일본 본토
사람이 아니라며 같은 국민들을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가장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2,500명이 넘고 문헌에
따라서는 6,000명에서 1만명을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참히 학살된 시신들]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 되고 난후에야 일본 정부는 조선인에 관한 루머를 유언비어라고 공식 확인 발표하였고,
피해자들의 수도 230여명으로
축소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자경단의 조사도 형식상에 그쳐 다들 무죄방면 되며 학살로 인한 사법적인 책임
또는
도의적인 책임을 진 사람, 단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주재 미국대사는 “이처럼 경악스러운 대학살이 대낮에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코
문명국이라 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을 태평스럽게 바라보며 제지하지 않는 일본정부는 세계 속에서도 으뜸가는 야만
정부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했습니다.
[미국에서 이뤄진 관동대지진 피해를 위한 모금운동 : 그리고 18년 후 일본은 배은망덕하게도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일본에서는 9월 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정해서 재난재해에 대한 대피훈련을 실시하며 당시의 재난을 기억하고
예방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최근 일본 교과서는 조선인학살을 조선인살해로 표현을 수정하며 재일동포들을
학살한 잔인한 과거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일본 우익시위대가 코리아타운에 습격해 시민과 상점 점원들을 폭행하고 간판을 부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죠. 그들이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말이죠.
[일본의 조선인 살해 표현에 관한 국내 언론사의 보도]
당시의 사건은 분명 자신들의 분풀이를 위해 무고한 조선인들을 죽여나간 학살이지 절대 살해라는 표현으로
대체 될 수 없으며,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은 자연 재해 발생 하에서 타민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만행으로 영원히 기록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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